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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사상가'안중근' 2018.02.12 09:28

 오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식민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던 '코레아 우라!(조선 만세!)'가 세월을 뛰어넘어 힘차게 들려오는 듯하다.

안 의사의 거사는 일제에 씻기 힘든 치욕과 타격을 안긴 반면, 조선과 중국에서는 우국충정의 상징으로 널리 추앙받았다. 심문과정에서 당당하게 열거한 이토의 15가지의 죄상은 10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사형이 선고된 뒤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시대를 초월해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의거 100주년인 올해와 순국 100주기인 내년에 다채로운 기념행사와 사업들이 줄을 이어 의사가 남긴 고결한 뜻을 되새기게 한다. 거사 후 순국 때까지 5개월 동안 수감돼 있었던 뤼순 감옥에 안 의사 전시관이 올해 문을 열었고, 서울 남산에는 새로운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내년 10월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대규모 학술대회 개최를 비롯해 논문집 발간 등이 잇따르며 안 의사를 소재로 한 연극, 오페라, 뮤지컬, 영화, 전시 등도 차례로 일반에 선보이고 있다.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조국을 위해 한 몸을 초개처럼 내던졌던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움직임들이 아닐 수 없다. 기념 행사와 사업들이 다채롭게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아쉬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의사의 유해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간차원에서 일찍부터 유해 찾기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최근에는 보훈처가 뤼순 감옥 북쪽의 매장 추정지를 발굴했으나 역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죽거든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이장해달라'는 유언을 여태 받들지 못하고 있는 셈이어서 후대로서 부끄러움이 크다. 뤼순 감옥의 안 의사 전시관이 당초 기대했던 규모보다 상당히 축소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업비 부족 때문이라고 하는데, 좀더 공을 들여 의사의 거룩한 뜻을 적극적으로 살려야 했다. 어찌 보면 의사의 유해보다 그 숭고한 뜻을 찾아 이어받는 게 더 중요하다.

그의 삶과 사상을 정확히 알고 평가함으로써 애국ㆍ애인ㆍ애민ㆍ평화정신을 오늘에 맞게 되살리자는 것이다. 안 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의 취지는 한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 평화와 발전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일시적 행사나 특정한 사업에 그치지 말고 국민 모두가 두고두고 추모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춰나가야 한다. 예컨대,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는 한국인의 발길은 갈수록 주는 추세인 반면, 이곳을 들르는 일본 관광객의 발길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사실은 무얼 말하는 걸까. 지나친 영웅화도 곤란하지만 한때 외로운 소수자였던 안 의사를 명실상부한 다수자로 확고히 자리매김되게 하려면 좀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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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인권사상 2011.03.06 09:05
천부인권사상 (天賦人權思想)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권리로서의 자유를 가지며, 어느 누구도 이를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 사상을 말하는데, 18세기 말에 자유사상이 일어나자 「자연법」과 함께 그 중심사상으로 주장되었다.<키케로(로마), 루소(프랑스)등> 천부인권사상은 미국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 아니고 18세기 초부터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일어난 계몽주의와 사회계약설과 관계된 것으로 미국보다 한 100년 빠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국가 공식문건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는 미국의 선언문과 프랑스의 인권 선언문이 있으며, 이둘을 동시에 중요시하지 어느 것이 먼저냐는 문제는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존엄과 이의 보장을 위한 자유와 평등등이 바로 천부인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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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2011.02.27 19:56
1903년 8월 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주류상으로 성공한 유태인이며 어머니는 오페라가수였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과 음악을 공부하였으며 졸업후 처음에는 빈에서 음악잡지 편집에 종사하였다. 1931년 논문《키에르케고르》를 발표하여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강사로 취임하였다. 1934년 나치스 정권이 들어서자 영국으로 이주하여 옥스포드대학에서 머물렀으며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하였다. 1949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다시 독일로 귀국,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사회조사연구소(調)를 개설하였다. 1950년에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파시즘 연구를 주제로 한 《권위주의적 인간()》을 간행하는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실천이나 행동보다 이론 탐구를 중시했으며 이런 그의 성향으로 학생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69년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난속에서 여학생들의 조롱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사회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고독한 이론가였으며 음악적 감수성을 가진 심약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1969년 8월 6일 스위스 비스프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상은 유물론적 변증법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체계성을 거부하고, 각 이데올로기 영역에 내포된 정신의 변질적 경향을 날카롭게 분석해내는 데 특색이 있으며, 근대문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비판을 제시하였다. 또 그는 현대음악의 성격에 대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현대음악에 대한 강좌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주요저서로는 위에 기술한 것 이외에 《현대음악의 철학》(1949), 《Soziologica》(1962), 《부정적 변증법()》(196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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