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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의 미학 2010.05.29 12:32

 

미메시스의 문제 3

- 인간이 미적 주관성에 이르는 경로 -

1. 미적 주관성에 대한 예비적 고찰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논의는 모든 미적 정립의 인간화 원리 내지 인간 중심적 원리를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러한 사태로 인해 제기 되는 문제

 

첫 번째는 미적 주관성의 본질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미적 주관성은 일상생활의 주관성과 동일하지 않다.

  

노동의 분화는 정당하다. 역사적 이유에서도 그렇거니와 노동분화는 내적 모순이 증대함에 따른 결과이다. 인간의 주관성이 순전히 과학적인 고찰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개인의 개성이 공동체에 의해 역사적이고 상대적인 해체를 겪는 것과 동시에 윤리와 법률과 조교 등의 욕구들이 발생하게 된다.

 

이제 이러한 단계에서 미적인 것이 아주 서서히 독자성을 획득해간다 하더라도 여기서 시작되는 분화는 주술시대의 원초적인 분화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예컨대  이미 미학이라는 것이 존재했을 정도로 상당히 발전된 고대문화에서도 역사서술이나 수사학 등과 같은 것이 본질상 미적 인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인간의 신체적인 존재와 아무리 거리가 멀고 표피적인 관계에 있는 것일지라도 만물은 어떤 의미로든 인간에게 본질적인 규정성을 가진다는 느낌이 확고하게 깔려있는 셈이다.

 

제2의 현실을 표현하는 수단인 현세의 현실에 대한 일종의 모방이라는 사실은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에서도 규명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종교는 예술을 아주 쉽사리 활용할 수 었었던 것이다.

 

예술은 구원으 계길부터 독립하여 자체의 완결성을 가지면서 자체의 형식 완결성을 통해 일체의 내세적 내용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독자성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만든다. 종교적 신앙에 의해 가장 먼저 배척되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것- 노동과 과학, 예술, 인간의 교양이다.

 

인간의 자기보존의 욕구는 매우 강렬해서 그 욕구가 충족되기만 한다면 그 욕구의 실현방법은 아무래도 무방한 경우가 있다.

 

96> 모든 종교적 문화와 특정시기의 문화가 예술적 형상화에 대해 품고 있는 깊은 불신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문화가 예술적 형상화에 불신을 품고 있다? 예술이 종교나 특정목적에 따른 문화로 인해 이용당한 것이 아니고? 왜 문화가 예술적 형상화를 불신하는가?

 

미적인 것의 특성- 인간의 총체성을 일깨우는 데 주력했왔으며ㅡ 모방예술에 이르러 미적인 것은 훌륭하게 질서잡힌 현실의 풍요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96> 미적인 것이 왜 인간의 총체성을 깨우는가? 루카치의 생각이 아닌가?

 

현실이 모든 대상 자체는 모사적인 재현을 통해 엠스테뤼스가 바라는 위와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속성과 자질을 무한히 내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목표 1. 객관적 가능성의 모사 ( 미적모방의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다.)

                 2. 자연을 넘어서는 것. (자연을 능가한다는 것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

 

엠스테뤼스의 결론 : 집약과 집중의 원리

                            최소한의 시대공간 속에서 최대한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 미의 개념에 대한 그의 규정.

 

 

욕구의 보편성은 언제나 사회역사적으로 결정된 구체적 형식을 통해 드러나고 나아가서 그 보편성은 예술가나 수용자에 의해 임의로 해소될 수 없는 직접적인 통일성을 이루며, 보편성은 구체적인 시대적 제약성에 완전히 스며들어서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 이 보편성은 예술가에게 제기하는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서 주어진다..- 이는 예술가가 갖춘 사회역사적 구체성에 대해서만 보편적이다.) 그 보편성은 구체성을 띤다.

 

엠스테뤼스는 형식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만 (주관적이라서) 미적인 것에 대한 가장 중요한 규정들 가운데 일부를 밝히고 있다.

99. 

 

추상성은 결국 객관세계의 인상에서 연유하고 또 객관세계로부터 차용하여 주관적으로 가공한 소재를 형식적이고 주관적인 계기로 환원시킨 것이다. 추상성은 구체적인 주객관계 속으로 해소되어 원래의 자연발생적인 추상성이 의식적인 추상성으로 변형되어야만 한다.

 

2. 주관의 외화와 자기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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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의식 2010.05.25 10:07

'존재하는 자아는 존재하는 절대자를 요구한다.
즉, 자아와 절대자와의 동일성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을 칸트 이후 돌일 관념론의 기본 명제였다.
여기서 동일성이란 단순히 A=A라는 의미는 아니다.
확실히 거기에는'생각한다'와 '생각된다' 라고 하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이 의식을 의식할 때 생각하는 것과 생각되어지는 것은
동일관계로 연결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하나의 자아가 자기를 선한 마음과 약한 마음으로 이분하여
자각하고 있다고 하자. 자아는 이러한 자각 속에서 자기의식이
성립되며, 이러한 자기의식의 성립이 바로 진리의 원형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 자신 속에 일반적인 것에 대해 반대적인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생각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이 진리의 원형이 된다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의식이 의식을 의식할때 라고 칸트가 표현한거 같다.

 

'논리학', '정신현상학' 등을 쓴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변증법을

체계화했습니다.

 

여기에 그 유명한 정반합(正反合)이라는 변증법 논리의 삼단계개념이 나옵니다.

(변증법 논리의 삼단계개념 = 정립, 반정립, 종합)

 

 역사나 정신 같은 모든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변증법적 전개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즉 하나의 주장인 정(正)에 다른 주장인 반(反)이 나오고, 여기에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이 나와 통합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변증법의 기본 전제는 이세상 모든것은 지속적인 반복과 끊임 없는 모순의 생성과

지양을 통해 변화 발전한다는 창조적 발전의 논리입니다.

 

모든 정립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된다면 그것을 스스로의 반정립 속에서 보게

될것이입니다.

 

요컨대 모든 사실은 그 대립자들과 정립이 아닌 다른 사물들과 연관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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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정반합의 원리는 반을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 반이 전의 정이었던 것과 합쳐져 다시 정이되고..다시 그 정은 반과 필연적으로

만나고 부정되었다가 만나 다시 종합이 된다.

 

관념론적 변증법과 유물론적 변증법

 

변증법은 변화의 법칙입니다. 통상 정반합이라는 명제를 통해 변화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구요. 어떻게 보면 세계 자체를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이 우선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변증법입니다.

관념론적 변증법은 관념론적 세계관에 근거하는 변증법입니다. 관념의 변화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구요.  유물론적 변증법은 유물론적 세계관에 근거하겠지요. 세계의 물질(실체)의 변화로 세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관념을 추상화된 것이라고 본다면 이미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것입니다. 관념론적이라는 용어를 사고하는 스타일로 이해하면 안 될 것이구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 세계를 관념으로 볼 것이냐 물질로 볼 것이냐로 구분할 때 관념론적이라는 것은 세계를 관념으로 이해한다고 보면 됩니다. 관념을 주로 해서 판단한다고 보면 될 듯 싶습니다.  관념에서 물질이 생성된다고 표현하던지, 어차피 물자체는 인식이 안되므로 인식가능한 관념만으로 세계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철학이 얘기되던지 간에 말이죠. (이걸 제대로 설명하려면 독일 관념론을 다 풀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길어질 것이구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은 관념(절대이성)(정)이 먼저 존재하고, 절대이성에서 물질(세계)(반)이 산출됩니다. 변증법적으로 발전 변화하면서 관념도 변화합니다.

유물론적 변증법에서는 물질이 먼저 존재하고, 관념은 물질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보는게 맞겠네요.

예를 들면 조금 명확성이 떨어질 수 있긴 한데요(예는 항상 이해는 빠르게 하지만, 명확하지 못하고 잘못 이해할 확률도 매우 높으니까요.) 

대표적으로 관념론으로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관념이 세상이라는 물질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대표적인 관념론이구요. 유물론은 통상 과학주의가 이야기하는 세계관이니까 예가 필요없겠구요.

변증법의 예를 들자면 18세까지 선거권을 주자는 주장(정)과 20세까지 선거권을 주자는 주장(반)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가 서로 합이 되어 19세까지 선거권을 주자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합)는 것이 있을 수 있구요. 그 이전에 변증법은 세계가 변화한다는 주장이 전제되고 있음을 말해야 할 것같군요.

 

둘째로, 그러한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볼 경우에 통상 이야기하는 유물사관을 얘기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회를 두가지로 구분해서 관념적 부분(예로 상부구조)과 물질적 부분(예로 생산력)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좀 더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이해가 쉬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물질적 부분의 변화가 관념적 부분의 변화를 추동하게 된다는 주장이 유물사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봉건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경우 생산력이 그만큼 발전했기 때문에 그러한 체제의 변화가 가능해졌다고 이야기하는 사관이겠죠. 물질적인 부분이 우선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지요.

이러한 부분이 반드시 포함이 되어야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제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기계론적 유물론을 극복한 변증법적 유물론

맑스 이전에도 유물론은 존재하였으나, 그러한 유물론이 변화를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유물론이었기에 그러한 유물론을 극복하는 변증법의 원칙을 담아낸 유물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기계론적 유물론(통상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탈피한 새로운 유물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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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실제와 무관하다-보드리야르 2010.05.25 09:38

 

월트 디즈니는 페스트나 옮기면서

시궁창을 전전하던 신세의 쥐를 잘 씻기고 입혀서 '미키 마우스'로 탈바꿈시켰다. 이 순간 이후, 디즈니는 온갖 동물들을 데려다가 이미지화 했다. 개는 '구피'가 되고 곰은 '위니 더 푸'가 되었으며 오리는 '도날드 덕'이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방식의 이미지화가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며 이후 실재의 부재마저 감춘다고 해석 하였다. 이 과정에서 디즈니사가 만들어 낸 온갖 종류의 상상과 환상의 산물들이 '시뮬라크르'라는 용어로 대체된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시뮬라크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이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미키 마우스'는 그 자체가 쥐임에도 더 이상 실재의 쥐가 아닌 시뮬라크르 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시뮬라크르의 개념이 현대 소비 사회를 비판하는 것일까. 미키 마우스 덕에 쥐가 깨끗해지고 귀여워져, 심지어는 침대 맡에 하나 두고 싶게 되었는데 말이다.

 미키마우스의 시뮬라크르는,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이후 현대 소비 사회속의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화 하기) 현상을 가속시켰다. 미키마우스의 이미지화 근거는 자본과 상업의 논리였고,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팔기위한 상업 자본의 논리로 상품의 실재와 이미지화된 가상의 실재를 분리시켜 후자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 현상이 소비 사회의 주류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보드리야르는 대중이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시뮬라크르에 너무 익숙해져 세상의 실체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상이 이미지화 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멈추고 합성된 이미지를 통해 위조된 현실을 보는 데만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 자체가 실종되고, 대중 문화, 매스 미디어가 사람들의 관념을 지배하는 현대 사회를 보면, 그의 해석이 비약적이지는 않은 듯 하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개념은 포스트모던 사상 중에서도 급진적이고 과격한 편에 속한다. 현 상황을 과도하게 비관적으로 묘사만하고, 발전적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비판도 많다. 하지만 사상이 급진적인 것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꼭 그 개념의 무가치를 증명할 수는 없는 듯 하다. 시뮬라시옹의 개념이 현 사회의 문제를 이전과 다르게 의식 하였으며, 그로 인한 고민이 파생되고 있는 것 자체가 이 개념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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