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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Femme Fatale)/ 치명적인 여.. 2010.05.24 23:57

클림트는 여성의 화가라고 불릴만 했다.

클림트의 대표적 작품 중에서 팜므파탈적 이미지가 가장 돋보이는 여인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여자 영웅 ‘유디트’였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논개와 마찬가지로 적장의 목을 베어 민족을 구한 강인한 용기와 지혜의 여성상을 나타내는 유디트.여인의 몸으로 남자의 목을 벤다는 것은 보통 담력과 용기가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그리고 그러한 행동에 걸맞는 유디트의 모습을 상상하면 도저히 팜므파탈적이고 퇴폐적인 관능미를 가진 여인의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채를 대롱대롱 들고 있는 흉측한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다.

 

하지만 클림트의 그림속 유디트는 그런 잔악하고 강인한 여인의 모습이 아니다. 

 

여성의 생명력,강인한 남성의 힘을 전복시켜버릴 만큼의 여인의 치명적 유혹,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달려들 수밖에 없는 이 독약과 같은 아름다움을 유혹적인 팜므파탈로서 새롭게 구현해낸 클림트의 유디트의 시선. 

 

클림트의 여성들은 안과 밖을 모두 가지고 있다. 여성이란 동물의 생물학적 모습과 여성성만이 지닐 수밖에 없는 여성만의 생명력, 유혹,수줍음,관능 등등. 클림트만큼 여성의 안과 밖, 그 에로티시즘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작가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클림트가 천착해온 여성성의 에로티시즘은 이때까지 미술사에서 관행처럼 이어져 내려온 여성성에 대한 너무나 당연하고 진부한 시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생각 역시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클림트가 아무리 여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일단 남성이다.남성의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것은 엄연히 한계가 있다. 이건 비단 클림트뿐만 아니라 지나간 모든 세기의 에로티시즘을 구축했던 남성 화가들에게도 해당되는 담론일 것것이다.

 

즉 여성의 관능미를 상징하는 에로티시즘은 남성 화가의 시각에 의해 구축되어온 남성만의 환상일 뿐이며,여성의 시각은 그 안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걸 뜻한다. 왜 남성은 바깥에서 관찰하는 대상이고,여성은 안에서 관찰당해야만 하는 수동적 피사체인가. 에로티시즘의 이 절대적 모순점은 클림트의 그림에서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19세기말 문화계 전반을 풍미했던 '팜프 파탈(Femme Fatale)'을  필름 누아르 비평에 접목한 이들은 프랑스의 영화평론가들이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영화 평론지였던 '까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들은 당시 미국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B급 범죄 스릴러 영화인 필름 누아르를 분석하면서 이들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특정한 유형의 여성들을 팜므 파탈로 통칭했다.

 

' Femme'는 여성, 'Fatale'은 '운명의', '숙명적인', '파멸로 끄는', '치명적인' 등으로 해석된다.

 

 이 사전적 의미에 성적인 매력을 더하면 팜프 파탈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오롯이 완성된다. 

 '치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적 매력을 지닌 여인으로는 누가 있을까?

 팜므 파탈은 세상의 시작과 함께, 여자라는 존재의 시작과 함께 있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팜므 파탈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악마의 꾐에 빠져 아담을 유혹하여 타락시킨 이브다. 이 밖에도 성서에 나오는 팜므 파탈로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동침한 후 직접 목을 벤 유디트, 삼손을 파멸시킨 들릴라와 살로메 등이 있고, 그리스 신화에는 스핑크스, 메두사, 세이렌이 등장한다. 역사에서는 클레오파트라와 루크레치아 보르자, 메리 스튜어트 등이 권력을 탐한 팜므 파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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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리즘 2010.05.24 22:49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경향들을 이르는데 흔히 평가절하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 그 기교적인 면에서 오는 차가움과 건조함이 개인의 주관적 성향의 극대화 결과 전성기 르네상스와 다른 경향을 의도하고 자연과 고대형식의 주관적 이상화를 지닌 내적 통찰력이 재평가 받고 있다.전반적인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신비감,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특히 파르미지아노(1503-1540), 틴토렛토(1518-1594), 코렛지오(1489-1534), 엘그렛코등이 대표적인 매너리즘 작가로 꼽히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후기작을 이 경향의 일부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으나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고나 점에서 자연미(이상미)가 아닌 세련미와 예술적 기교, 신비한 관념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적 특징으로는 콘트랍포스터의 극단적인 바른 포즈와 인체의 장신화,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

처리의 매끈함, 단축버과 원근법의 과장, 비논리적인 공간배치이다.

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의 인물묘사에서 나타나는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레토의 <최후의 심판, 만찬>은 그 이전의 <최후의 심판>과 비교하면 단번에 확인되는데 강한 불빛의 명암대비, 동세가 격한 인물들의 움직임고 불안정한 사선구도등이 마이에리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엘 그레코와 코렛지오는 종교화를 그렸다.

 

특히 엘 그레코는 톤이 밝고 대담한 붓질과 신비스러운 종교화를 이루고, 반면 코렛지오는 스퓨마토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인체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그는 신화를 다른 내용에서도 환성적인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틴토레토의
<성 마르코의 유해발견>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코렛지오의 <거룩한 밤>



파르미지아노의
<목이 긴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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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르네상스 2010.05.24 22:44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알프스를 넘어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에스파냐, 영국 등 전 유럽에 걸쳐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대립과 분열,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외세의 개입 그리고 지중해로부터의 대서양 연안 국가들로의 세계무역의 중심 이동은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을 이탈리아로부터 북유럽의 여러 나라로 이동시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탐미적 ․ 감각적 ․ 귀족적 성격을 지녔다면 북유럽 르네상스는 지적이고 사회 개혁적 ․ 대중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것은 북유럽 지역이 이탈리아보다 봉건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주로 성서와 기독교 경전을 원어로 연구했으며 기독교전신으로의 복귀에 관심이 많았다.


15세기를 거치는 동안 북유럽의 대학생들은 끊임없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으며, 이탈리아의 저술가나 예술가도 알프스 이북으로 여행을 하곤 했다. 이와 같은 교류는 사상의 확산을 촉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유럽 국가들이 예술과 문학의 광범한 전파를 지원할 만큼 경제 번영과 정치 안정을 누리게 된 것은 1500년경 이후의 일이었다. 지적교류는 특히 1494년 이후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시작하면서 활발해 졌으며 그 결과 북유럽 인들은 이탈리아인들이 이룩한 업적을 더 많이 배우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는 하나의 국제적인 운동이 되었으며, 이탈리아에서 쇠퇴하기 시작한 후에도 북유럽에서는 고스란히 그 활력이 유지되었다.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사회 ․ 문화적 전통이 중세이래로 제각기 서로 달랐기 때문에 두 르네상스에는 차이가 있었다. 북유럽은 이탈리아에 비해 상업적, 도시 지향적 경제가 훨씬 저조했다. 게다가 북유럽의 어떤 도시도 도시 인근 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권력은 국민 국가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그 지배자들은 1500년경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의 교육 ․ 문화적 주도권을 기꺼이 인정해 주었다. 그 결과 북유럽의 대학들은 신학 연구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고, 북유럽 주요 도시들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은 대부분 성당이었다.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기존의 북유럽 적 전통 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을 접목시킴으로써 이룩되었다. 이것은 북유럽의 가장 두드러진 지적 운동인 기독교적 휴머니즘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북유럽의 휴머니스트들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이 실생활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논리적 천착에만 골몰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적인 지침을 순수한 성경 ․ 종교적 가르침에서 구했다. 그들은 고대로부터 지혜를 구했지만, 그들이 염두에 둔 고대는 이교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것이었다. 북유럽의 예술가들은 이탈리아인들에 비해 고전적인 주제를 훨씬 적게 묘사했고, 북유럽 기독교가 지닌 금욕주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벌거벗은 누드를 감히 그리지 못했다.


기독교적 휴머니스트들은 성경 및 초대 기독교의 원전들을 편집하고 복음적인 도덕을 해설하는 공동 작업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휴머니즘 운동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흥기로 말미암아 전열이 흐트러졌고, 그 후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기독교적 휴머니스트들은 복음서가 문자 그대로의 진리임을 강조하고, 성직자들의 부패와 종교적 의식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마르틴 루터에 의해 1517년에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의 길을 예비했다.


대부분의 기독교적 휴머니스트들은 의식주의를 반대하고 내적 경건의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카톨릭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과의 전쟁이 날로 격화되면서 카톨릭의 종교 관행에 대한 어떠한 내부적인 비판도 적을 돕는 행위로 비쳐졌기 때문에 카톨릭 지도자들은 휴머니스트들에게 관용적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휴머니즘은 1525년 이후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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